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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찬송가 에세이 ⑯ - “종교개혁기념일에 많이 불리 우는 유명한 찬송가”

관리자
2022.03.25 18:07 9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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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찬송가 에세이 ⑯
      제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작사  마틴 루터(1483-1546)    EIN FESTEBURG

 지난 주일 2부예배의 할렐루야 찬양대의 특별찬송이 미국민요 “쉐난도어”곡으로 부른 “어지러운 세상에서”였다. 그동안 주일예배의 목사님 설교가 찬양대의 찬양 내용과 일치한것에 대해 찬양곡을 사전에 조절을 하시느냐고 목사님께 여쭌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하셨었다. 일단 가사의 내용은 접어두고 미국 민요 “쉐난도어”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주제곡이면서 영화 제목이 된 것으로 민요가 대개 그러하듯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퍽 애잔한 곡이다.
 “쉐난도어”는 미국 버지니아주의 같은 이름의 강이 흐르고 같은 이름의 계곡으로 된 관광명소이며 또한 그곳에 살던 인디언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백인 남자와 인디언 처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민요 “세난도어”는 원래 강에서 배를 젓는 사공들이 불렀다고 한다. 그 민요가 영화 “쉐난도어”의 주제곡이 된 것이다.
 제임스 스튜어드 주연의 “쉐난도어”는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부유한 농장주요 여섯 명의 아들딸을 거느린 감리교인 가장의 가족 이야기이다. 철부지 막내가 남부군으로 오인되어 포로가 되면서 남북 어느 편에도 들기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이기를 주장하던 고집장이에게 전쟁은 들이 닥친다. 결국 아들을 찾기 위해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중 오히려 다른 아들과 며느리를 약탈자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전쟁은 끝나고 오랜만에 남은 가족들이 주일을 맞아 마을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개회 찬송이 쉐난도어 계곡으로 울려 퍼질 무렵 예배당 문을 비집고 들어서는 것은 목발을 짚은 막내 “보이”이다. 극중의 찬송가는 384장-아버지는 강하게 아들을 끌어안으며 찬송가를 부른다. 더욱 큰 소리로.

 찬송가 384장은 종교개혁기념일(10월31일)에 많이 불리우는 마틴 루터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찬송가이다. 가사는 물론 루터 자신이 썼다고 하며 노래도 종교개혁 당시의 전투적인 정신에 적합한 격렬하고 웅장하게 표현되고 있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칸타타 80번”은 루터의 곡이라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사용하고 있다.
 1517년10월31일 마틴 루터는 이른바 “95개조”를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당 정문에 붙임으로서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부패한 교회의 교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곧 죽음을 의미했는데 젊은 신학자 루터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95개조”란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를 거부하며 인간은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성서가 직접 진리를 가르친다는 내용의 95개항으로 되어있는 반박문-이를테면 오늘날의 대자보였던 것이다.
 교황은 곧 루터를 단죄하는 칙서를 내렸으며 이어 파문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정세였다. 교황에게 맞서는 루터의 모습은 독일 귀족과 농민들에게 독립심을 고취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을 옹호하는 측과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간에 대결이 그치지 않고 끝내 루터는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 교황으로부터 루터의 추종자들에게 1597년4월20일 “루터와 결별하라”는 최후 통첩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의 45세-삶이냐 죽음이냐 개혁이야 굴종이냐의 결단이 있어야 할 순간 하나님으로 부터의 응답이 있었다. 그것은 시편 46편에서 영감을 얻어 장엄하고 전투적인 노래-“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지어 추종자들과 함께 불렀던 것이다. 그의 소극적이던 태도에서 적극적인 대응으로 새 시대를 맞는 순간이었다. 이를 두고 제임스 마팻은 이렇게 말했다.<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시기에 가장 위대했던 사람이 쓴 가장 위대한 찬송>이라고.
 곡은 루터의 작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월터의 곡이라는 새 주장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그 시절 루터는 간단한 멜로디를 많이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신앙의 노래,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 동요와 민요, 그리고 캐롤 등이다. 이 노래들은 유럽의 각 나라에 전파되었다.
 루터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요소로 찬송가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기독교적으로 교육시키는 데는 음악이 중요 역할을 한다고 인식했다. 그 시대는 음악은 가톨릭교회나 궁정음악으로 상류사회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이것이 빈부를 구별하지 않고 두루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종교개혁이후였다. 종교개혁은 신앙뿐 아니라 음악 즉 차농가의 자유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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