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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신학자 죽산(竹山) 박형룡 박사 와 정암(正岩) 박윤선 박사의 생애와 업적

관리자
2024.05.23 15:54 29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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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죽산(竹山) 박형룡 박사 와
정암(正岩) 박윤선 박사의 생애
박형룡 박사
박형룡 박사(1897-1978)는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평안북도 벽동 출신이다. 그는 한국 보수신학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호는 죽산(竹山)이다.

박형룡 박사의 생애
- 평양신학교 교수 취임: 1931년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33년 루이스빌의 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신사참배 거부운동: 1938년 6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었다.
- 합동교단 내분과 분열: 한국의 보수신학을 이끌어왔던 박형룡 박사는 합동교단의 내분과 분열의 와중에서 1978년 10월 25일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81세의 일기로 천국입성을 하셨다.

박형룡 박사의 업적
- 한국 보수신학의 대표적 인물: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양대 산맥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 신사참배 거부운동: 박형룡 박사는 1938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여 평양신학교 폐쇄를 초래했다.
- 합동교단 내분 와중 사망: 박형룡 박사는 합동교단의 내분과 분열의 와중에서 1978년 10월 25일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천국입성을 하셨다.

평가
- 보수신학자로 평가: 박형룡 박사는 한국의 보수신학을 이끌어왔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신학의 양대 산맥 박윤선 박사
박형룡 박사와 더불어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인물은 박윤선 박사다. 박윤선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교육자로, 박형룡 박사와 함께 한국 보수신학을 이끌어왔다. 박윤선 박사는 190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78년 12월 25일 서울에서 73세의 나이로 천국입성을 하셨다. 그는 평양신학교와 총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장로교회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종합적으로,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보수신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실로 박형룡박사 의 업적은 한국교회 토양분이 되였다.

더불어 그와 함께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정암(正岩) 박윤선 박사의 생애와 신학 박윤선(1905-1988) 박사는 평안북도에서 태어났고,
 19세에 대동소학교를
6학년으로 입학하여 1년 공부하고 졸업했다.
17세에 동문동 교회에 출석했으며, 18세에 15세 되던 김예련과 혼인을 했다.
26세 되던 1931년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4세에 평양신학교를 29회로 졸업하고, 원어를 배우기 위해 메이첸 박사를 만나러 웨스트민스터에 가서 공부를 했다.
박윤선 박사는 시대적인 소명을 받고 실천에 옮기는 신학자였다.
박형룡 박사가 조직신학으로 한국교회에 뼈대를 놓은 것처럼,

박윤선 박사는
성경신학을 통해 혈액을 온 몸에 공급하였다.
"마침내 웨스트민스터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박윤선박사는
나는 이제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깨닫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였다.

이전의 평양신학교는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이지만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는 못하였다고 생각했던 박윤선 박사에게 칼빈주의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소명처럼 받아들여 졌던것이다.
정암 박윤선 박사에게 뼈아픈 사건이 있습니다.
신사참배에 참여했고, 두고두고 후회를 했습니다.
"정암은 신사 참배와 일본기에 대한 경례 문제로 고민하다가 드디어 사임하고,
봉천에서 80km 떨어진 공업 도시 안산으로 가서 해방 직전 2년 동안은
요한계시록 주석 쓰는 일에만 집중했다.
1946년 2월 월남하여 한상동 목사와 함께 평양신학교 전통을 잇는 신학교를
세우자는 뜻에 동의를하고. 월남할 때 지닌 책들이 있였는데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흐레이다너스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지니고 왔다고 한다.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역할은 어디까지였는가?
특별히 박형룡 박사은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평양신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쳤던 그 신학이 바로 사도적 신앙이며, 지켜야 할
신학이라 생각을 하였다.
"한국교회의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 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의 바른 신앙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칩십년 전에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학을 우리 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인것이다.
박윤선 박사 역시 비슷하였다.
"박윤선의 신학이란 독특한 그 나름대로의 신학을 일컫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바울과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이요, 칼빈주의의 신학이며, 개혁주의 신학이고, 웨스트민스터교리 표준에 밝혀 놓은 장로교 신학을 이어받은 신학이다
박윤선 박사는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스타일이어서 가정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48세에 화란에 5개월 정도 유학을 가기도 하였다.
화란 유학은 사모님의 천국입성으로 끝났지만 신구약 주석 저술에 있어서 폭을 넓혀 주었다.

1980년 총신대 학내 문제로 혼란을 겪을 때 이영수 목사를 불러서 퇴진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교권을 쥐고 있던 이영수로부터 큰 상처를 입습니다.
"당시 교권의 대표자인 이영수 목사에게 정암이 한국교회 전체를 위하여 교회 정치로부터

물러나도록 호소해도 듣지 않고, 오히려 위협하는 말로 대응할 뿐 아니라, 행정에도 무능한
인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정암은 학장 서리직을 사임하였다

정암 박형룡 박사의 개혁 사상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 제일주의다.

둘째, 성경 중심주의이다.

셋째, 교회 중심주의이다.

넷째, 일반은총과 그리고 이에 따른 세상에서의 적극적 삶에 대한 강조였다.

박윤선 박사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성경 연구의 기쁨과 사명의 가치를 알았기에 박윤선박사의 주석을 많이 참고한다.

"공부하다가 죽었다는 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처럼 
죽산(竹山) 박형룡 박사 와
정암(正岩) 박윤선 박사의 신학정신을 이어받은 신학자들이 많이 나와서 한국신학의 미래를 밝혀 줄것을 기대하여 본다.

국제중앙신문 발행인 강영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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