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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찬송가 에세이 ⑥

관리자
2022.01.12 20:25 10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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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찬송가 에세이 ⑥
      제487장  “죄짐맡은 우리 구주”
      작사  죠셉 M 스크리븐(1819-1886)  작곡  찰스 C 컨버스(1832-1918)

 50년대-아직 6,25 전쟁이 끝나기 전이다. 북에서 온 많은 실향민들이 창영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중에 지금은 이름이 잊혀졌지만 황해도 연백에서 오신 늙은 권사님 내외분이 계셨다. 그분은 지금의 동부경찰서 정문 맞은편의 금곡동 골목 안 기자의 죽마고우 김유광군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계셨다. 성격이 조금은 급하셨다는 기억이다. 부부싸움은 아니지만 가끔 고성이 들릴 때가 있었고 김군(현재 LA 거주)의 방에서 역시 친구 이해석군(원로목사)과 셋이서 떠들고 장난치는 소리가 나면 공부는 언제하려고 무슨 짓거리들이냐며 야단 치셨다.
 당시는 방금 여호와의 증인이 활동을 시작하던 때였는데 신자이던 인천여중의 모 교사가 이따금 토론하자고 우리를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이럴 때 그가 억지를 부려 언쟁이 벌어지면 영낙없이 권사님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 나오셔서 그에게 외치시는 것이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그런데 권사님이 좋아하시는 찬송가가 487장 “죄짐맡은 우리 구주”였다. 아마 밤에 잠자리에 드실 때 까지 계속 이 찬송을 부르셨던 것 같다. 그중에도 2절의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를 좋아하시는 듯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이 특별히 좋아했던 부분은 3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다. 옛 찬송가로 168장 “근심걱정 무거운 짐/아니 진자 누군가/피난처는 우리 예수/주께 기도드리세/세상친구 멸시하고/너를 조롱하여도/주의 품에 안기어서/참된 위로 받겠네”이다. 자식도 없이 단 두 내외가 피난 내려와 의지할 곳은 오직 예수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느라 “죄짐맡은 우리 구주”는 기자도 가사를 암기할 만큼 덩달아 자주 듣고 부르는 찬송가가 되었다. 그 후 권사님은 서울인지 자리를 잡아 이사하셨는데 지금 그분은 돌아가셨겠지만 찬송가 487장을 부를 때면 그분이 생각나고 그분을 생각하면 “우리 약함 아시오니”가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우는 찬송가 “죄짐맡은 우리 구주”는 죠셉 M 스크리븐이 작사했다. 약혼녀와 사별 캐나다에 이민 비들리의 가정교사로 있을 때 지은 노래이다. 고국의 어머니가 중병으로 누워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젖어 간절히 기도하기를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평생을 주께 몸 바쳐 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작사한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잃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여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주시면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위로와 가슴 속 깊이 평화가 가득함을 느끼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아픔은 더 큰 사랑을 위해 견딜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간절한 편지를 쓰고는 영감을 받아 한편의 시를 써서 편지에 동봉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487장이다. 그의 울부짖는 기도는 기적을 일으켜 어머니의 병도 치유되었다고 한다.
 이 시를 쓰게 된 연유에 대해 훗날 전기 작가이며 찬송가 478장 “주 날개 밑 내가 편히 쉬네”의 작곡가 아이라 데이빗 생키가 묻자 그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썼으며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어느 누가 당신의 작시가 틀림없느냐고 물었을 때는 “주님과 내가 함께 썼다”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이 찬송가를 평가하기를 메이흔 박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 찬송가는 기독교 찬송가에 가장 유명한 캐나다 사람의 기여”라고 했다.
 
 작사가 스크리븐은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1819년9월10일 다운군의 씨 패트릭에서 출생 더블린의 트리니드 대학을 졸업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등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이로 플리머드 형제단에 소속한 신앙이 돈독한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약혼녀의 돌연사로 그의 생애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 결국 우울한 삶으로 생을 마감했다. 결혼 전야 약혼녀가 탄 배가 호수에서 침몰 익사하자 그 역시 슬픔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슬픔을 잊으려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허약한 몸으로는 그 마저 쉽지 않아 포기했다.
 원래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국에서 약혼녀와의 사별 등 뜻대로 되지 않자 어머니조차 고국에 남겨두고 캐나다로 이민했다. 온타리오주 라이스 레이크와 이웃한 비들리를 번갈아 오가면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던 중 제임스 색빌 씨 댁에서 어머니의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카나다 감리교회에 소속된 그는 극히 소박한 성직자로 생활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자로서 고아와 가난한 과부 그리고 병자를 찾아 돌보며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으며 심지어 성자라고 말했다. 겨울날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코트 까지 벗어 주느라 미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의 죽음도 비참했다. 이미 고국에서 부터 우울증을 안고 온데다 두 번 째 약혼녀마저 결핵으로 쓰러지자 더욱 심해지고 돈 없고 건강마저 악화하여 친구들에게 오히려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병으로 누워있다는 기별을 받고 친구가 찾아 갔을 때 한밤에 방은 비었고 다음날 인근 개울물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왔으나 정작 그들로 부터 도움에 보답하려는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그는 가버렸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아는 포트 호프 사람들이 고속도로변과 무덤에 기념비를 세워 주었는데
 <박애주의자요 1857년 포트 호프에서 쓴 위대한 걸작품의 작사가 죠셉 메드리칼 스크리븐이 누워있다>는 글귀와 그의 찬송시 3절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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