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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찬송가 에세이 ⑲ “19세기의 침울한 복음주의자 헨리 프랜시스 라이트 목사가 소천하면서 쓴 유작”

관리자
2022.04.15 01:42 5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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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철의 찬송가 에세이 ⑲
- “19세기의 침울한 복음주의자 헨리 프랜시스 라이트 목사가 소천하면서 쓴 유작”
      제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작사  핸리 프랜시스 라이트(1793-1847)  작곡  윌리엄 헨리(1823-1889)

 학우 김종태군이 책 한권을 보내왔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이다. 안교수는 기자의 중앙신학교 시절 은사이시다. 갓 입학한 신입반의 담임이시면서 마가복음을 가르치셨다. 1996년 75세로 고인이 되신 분이나 여러 가지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분이다. 굵은 검은테 안경에 곱슬머리 노총각으로 퍽 독설가셨다. 1954년 그때는 마침 서울 D교회에 분규가 있어 양측이 교회 마당에서 투석전을 전개하느라 부끄럽게 했던 때인데 이를 두고 만일 예수께서 그 교회에 오신다면 돌팔매에 쫓겨나실 것이라고 했었다. 그때만 해도 벌써 대형교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도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예언을 상기시키셨다. 그런 한편에는 퍽 유머가 풍부하고 다정다감 자상하셨다는 기억이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제지간으로서 언제나 주눅이 들 수 밖 에 없는 거북한 관계였다.
 그제나 이제나 프린트물을 만들어 돌려보기를 즐겨하던 기자의 습성이어서 몇회 던가 8절지 양면에 “어린양”이란 이름으로 학우들의 글을 실어 돌려보았는데 창간호에 안교수님의 글을 청탁하여 실었던 적이 있다. 내용은 지금 생각나지 않지만 “신학도”란 제목의 감동깊은 안교수 특유의 명문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분이 5년 전 새벽꿈에 찾아 오셨다. 학생시절 토론회 석상인듯 한데 느닷없이 기자에게 “에베소 1장17절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알리가 없었다. 꿈속에서 조차 알량한 자존심 발동으로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 마가복음을 강의하시는 분이 에베소서는 어찌 물으시냐고 반문하다가 잠이 깨었다. 꿈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생생했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경을 펴들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였다. 그 자리에서 기자는 19절 까지를 아예 암기했다. 그러나 이날까지도 그분이 왜 찾아오셔서 그 말씀을 들려주셨는지를 깨닫지 못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수시로 자문한다.
 그런데 이번에 보내온 그분의 평전 내용중에 찬송가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를 좋아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저녁예배때 즐겨 부르셨다는 것이다. 기자도 좋아하는 찬송이다. 아니 크리스챤 된 사람으로서 이 찬송을 좋아하지 않는 이 없을 정도로 모두가 좋아하는 찬송이다. 미국의 한 음악잡지가 애창하는 찬송가를 묻는 앙케이트에서도 1위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는 19세기의 침울한 복음주의자 헨리 프랜시스 라이트 목사가 작시한 찬송시이다. 영국 데본셔의 로워 브릭스헴 교구 목사로 시무한 끝에 젊어서 부터의 병약함이 악화하여 소천하면서 쓴 유작이다.
 스코틀랜드 켈소에서 태어난 라이트 목사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극심한 가난속에서 성장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 한때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이를 포기하고 목사가 되어 여러곳에서 목회했다. 목사님의 딸로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반려자를 만나 가난은 면할수 있었으나 젊었을 때의 폐결핵과 천식으로 병고는 가시지를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촌 마을인 로워 브릭스헴에 부임하여 거친 뱃사람들을 위해 전 생애를 헌신했다. 해변을 거닐면서 설교 말씀을 준비하고 시를 지었다. 해변 마을에 온지도 24년 악화일로의 병세는 한계에 이르렀다. 교우들이 일기가 따뜻한 이태리로 가서 요양하라는 강요를 거부치 못하고 결국 송별 설교를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으로 행사하시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러 인생의 황혼이 다가와 날이 어두울 그 엄숙한 시간을 모두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해변을 걸으면서 한편의 찬송시를 작시 교우들에게 낭송하자 교우들 모두가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그 찬송시를 친척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2개월을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의 남부 니스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아 죽음을 겁낼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예수께서 나보다 먼저 무덤에 내려 오셨으니 나는 평화의 소망을 가진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라이트 목사가 돌아오는 길이 아니라 떠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전한다. 즉 1827년 스코틀랜드의 항구에서 승선 첫 번 기항지인 프랑스 북부의 한 항구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음날 아침 출항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목사님이 나타나지 않아 호텔로 찾아가 방문을 열었더니 그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고 테이블에 밤사이에 쓴 시 한편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늘날 전세계가 애송하는 찬송가 531장이라는 것이다. 제목은 “나와 함께 거하소서”(Abide with Me)였다. 원문을 직역한것은 이러하다.

  날은 빨리 저물고/어둠이 짙어 가는데/주님 내안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수 없을때/오직 나를 도와 주실수 있는 주여/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 처럼 멀어가고/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안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병도 힘을 못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하늘의 새벽이 밝아올때/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    라질 것이오니/사나 죽으나 내 속에 거하소서

 작곡자 위리엄 헨리 몽크는 런던 태생의 교회음악가요 유명한 교육가였다. 킹즈대학의 성가대장 올개니스트 성악교수등을 지냈으며 1882년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몽크는 어느날 자기 조수가 피아노실에서 연습곡을 치고 있을때 그 곡을 듣는 순간 선율이 떠올랐으며 10분도 못되어 작곡했다고 한다.
 라이트 목사는 80여편의 찬송시를 작사했으며 두권의 찬송시집을 출간했다. 오늘날 불리우는 그가 작시한 찬송가는 19장(내 영혼아 찬양하라) 38장(주의 영광 빛나니) 367장(십자가를 내가 지고)이며 몽크가 작곡한 곡은 156장(싸움은 모두 끝나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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